한 경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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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시제 유현은 전한 경제의 후손으로, 녹림군의 농민 반란을 틈타 황제로 즉위했으나, 무능한 통치로 인해 몰락한 인물이다. 그는 23년에 황제가 되었으나, 장인 조맹에게 국정을 위임하고 측근들의 전횡을 방치하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결국 적미군에게 패하여 살해당했으며, 그의 정권은 25년에 멸망했다. 후한 광무제에 의해 회양왕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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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시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경시제 |
본명 | 유현(劉玄) |
자 | 성공(聖公) |
통치 | |
즉위 | 23년 2월 |
퇴위 | 25년 9월 |
연호 | 경시(更始) : 23년 - 25년 |
인물 | |
출생 | 불명 |
사망 | 25년 12월 |
아버지 | 유자장(劉子張) |
어머니 | 하씨(何氏) |
배우자 | 조황후(趙皇后), 한황후(韓皇后), 번황후(樊皇后) |
자녀 | 유구, 유흠, 유리 |
기타 | |
시대 | 현한 |
묘호 | 없음 |
능묘 | 패릉(覇陵) |
위치 | 지금의 산시 장안현 동쪽 |
재위 기간 | 23년 ~ 25년 |
이전 황제 | 왕망 |
다음 황제 | 후한 광무제, 유분자 |
2. 생애
경시제 유현은 전한 경제의 후손으로, 아버지 유자장(劉子張)과 어머니 하씨(何氏) 사이에서 태어났다.[7] 동생이 살해당하자 빈객과 함께 복수하려 했으나, 빈객이 법을 어기면서 관리를 피해 평림(平林)으로 숨었다.[7] 이후 녹림군의 농민 반란에 가담하여 경시장군(更始將軍)이 되었고, 23년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로 즉위하여 한나라를 재건했다.[10]
즉위 후 궁정 생활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장인 조맹(趙萌)에게 모든 권한을 맡겼다. 조맹은 권력을 남용하여 반대하는 신하들을 처형했고, 이일·주유, 왕광·장앙 등은 각지에서 백성들을 수탈하여 원성을 샀다.[10]
25년, 적미군이 장안으로 진격하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했다.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결국 장앙의 사주를 받은 사록에게 살해되었다.[10]
2. 1. 즉위 과정
22년 녹림군의 농민 반란이 발생하자, 유현은 진목(陳牧)과 요담(廖湛)이 일으킨 평림병(平林兵)에 합류해 안집연(安集掾)을 맡았다.[10] 23년 정월, 녹림군 연합군이 신나라 군대를 격파한 후, 유현은 경시장군(更始將軍)이 되었다.[10] 이 무렵 녹림군의 세력이 커지면서 여러 장군들이 난립하자, 전한의 종실 중에서 황제를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유현은 신시병과 평림병의 지지를 받았고, 유인은 남양군의 사대부들과 하강병의 지도자 왕상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하강병의 지도자 장앙이 유현을 지지하면서, 내분을 꺼린 유인이 물러나 유현이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10]경시제는 즉위 후, 유인을 대사도에 임명하는 등 주요 인물들을 등용하고,[10] 5월에 유인이 완성을 함락하자 6월에 완성을 수도로 삼았다.[10] 그러나 유인의 위명이 높아지자 그를 질시하여 주살하고, 광록훈 유사를 대사도로 삼았다.[10]
2. 2. 통치와 내분
경시제는 왕망을 타도하고 장안을 함락한 후, 낙양을 거쳐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유약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장인 조맹(趙萌)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국정을 농단하게 하였다.[10] 조맹은 자신에게 방종하다고 말하는 신하를 직접 처형할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10] 조맹의 전횡과 더불어, 이일·주유는 산동에서, 왕광·장앙은 삼보에서 전횡을 부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졌다.[10]이러한 상황 속에서 24년 12월, 적미군이 관문을 넘어오기 시작했다.[10]
25년, 장앙, 신도건, 요담 등은 장안에서 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경시제를 협박하려 했으나, 경시제가 이를 눈치채고 신도건을 처형했다. 이에 장앙 등은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공격했고, 경시제는 패하여 신풍(新豊)으로 도망쳤다. 이후 왕광, 진목, 성단 등도 장앙과 공모한 것으로 의심하여 그들을 처형했으나, 왕광은 장안으로 가 장앙에게 합류했다. 이송이 경시제 편을 들어 장안성으로 들어가 싸웠으나 패배하고, 경시제는 장신궁(長信宮)으로 옮겼다.[10]
2. 3. 몰락과 최후
25년 적미군이 고릉(高陵)까지 진격해오자 왕광·장앙 등은 적미군에게 항복했고, 함께 성을 공격했다.[10] 경시제는 이송에게 출전하게 했으나 패배했고, 2천여 명이 죽었으며 이송은 생포되었다. 이송의 동생 이범(李汎)이 성문교위를 맡고 있었는데, 적미군이 형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이범에게 성문을 열게 했다.[10] 9월, 적미군이 성에 들어오자 경시제는 홀로 달아났다. 시중 유공이 걸어서 고릉으로 와 함께했다. 경시제를 놓쳐서 적미군에게 주살될까 두려워한 성 바깥 경비 담당 우보도위 엄본(嚴本)에게 들켜 갇혔다. 적미군은 20일 안에 항복하면 장사왕(長沙王)으로 삼겠다고 했다. 유공을 보내 항복을 청했고, 적미군은 장군 사록(謝祿)에게 항복을 받게 했다.[10]25년 10월, 사록을 따라 나와 웃옷을 벗고(육단) 장락궁에 이르러 옥새와 인수를 적미군의 황제 유분자에게 바쳤다. 적미군은 경시제를 억류하고 죽이려 했으나, 유공과 사록이 살려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적미군이 듣지 않자 경시제를 풀어주고 함께 칼로 자결하려 했다. 번숭이 이들을 말리고 경시제를 사면하여 외위후(畏威侯)에 봉했다가, 나중에는 약속대로 장사왕에 봉했다. 이후 경시제는 항상 사록과 유공에게 의지했다.[10]
적미군이 삼보를 약탈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경시제에게 향하자, 장앙이 사록을 부추겨 경시제를 교살했다. 유공은 밤중에 경시제의 시신을 거두어 숨겼다.[10]
후한 광무제는 즉위 후 경시제를 회양왕(淮陽王)으로 추증하고, 지금의 산시 장안현 동쪽 패릉(霸陵)에 장사지냈다.[10]
3. 가계
경시제는 전한 경제의 후손으로, 장사 정왕 유발의 계열이었다. 할아버지는 창오 태수 유리(劉利)이며, 아버지는 유자장(劉子張)이고, 어머니는 하씨(何氏)이다.[10]
아내로는 조맹(趙萌)의 딸인 조황후(趙皇后)가 있었고, 첩실로는 하씨(何氏)와 한씨(韓氏)가 있었다. 한씨는 술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아들로는 유구(劉求), 유흠(劉歆), 유리(劉鯉)가 있었다.[10]